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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 정유정 장편 소설

by A6K 2020. 10. 25.

정유정 작가의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사실 정유정 작가의 이름을 보고 고른 책이 아니라 종의 기원이라는 이름을 보고 고른 책인데, 동명의 책인 '찰스 로버트 다윈'의 『종의 기원』이거나 해설본인 줄 알고 구입했던 책이다. 구입해놓고 한참을 안 읽다가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진화론에 대한 얘기가 아닌 '한유진'이라는 인물이 주인공인 소설이었다.

어짜피 구입한거 읽어나보자하고 읽다보니 마치 '그것이 알고싶다'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되었다. 그것도 4K 영상으로 현장을 생생하게 재현해주는 묘사들은 압권이었다. 문장하나하나를 곱씹으며 머리속으로 장면을 렌더링해가며 읽는 바람에 책을 일주일 넘게 잡고 있었다. 분명 스토리 진행은 되었는지 하루에 '리디 페이퍼' 기준 100페이지를 넘게 진도를 빼지 못했다. 그렇지만 조바심은 나지 않았고, 늘어지는 페이스에 쉽게 찾아올 수 있는 지루함이 끼어들 틈 같은건 없었다.

간만에 재밌게 읽은 책이다.

줄거리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스포일링이 있으니 책을 아직 읽지 않은 독자의 경우 뒤로가기를 해도 좋다.

종의 기원 - 인물관계

주인공인 나는 '한유진'이라는 인물이다. 어딘가 문제가 있어서 약을 복용해야하는 인물이며, 일반적인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 묘사되면서 시작한다. 약을 먹으면서도 약에 대한 거부감을 항상 가지고 있다. 촉망받는 수영선수였지만 약을 끊고 아시안게임 국가대표선발전에 출전했다가 경기도중에 발작을 일으켜 짧은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이후 변호사를 꿈꾸는 학생으로 살게 되었다.

주인공은 약 복용을 습관적으로 중지하면서 약을 먹어야한 하는 현실에 저항하게 되는데, 부작용으로 '개병'이라는 흥분 발작 상태가 발현된다. '개병'이 발생하면 주인공은 집 밖으로 몰래나가 인적이 드문 군도 신도시의 군도해상공원의 은하수전망대까지 전송력으로 달려갔다 온다. 물론 엄마 '김지원'의 감시를 피해 몰라하는 일탈 행위다.

사건은 '개병' 발작으로 몰래 나갔다가 들어온 이후 잠들었다가 전화를 받고 깨면서 시작된다. 피범벅이 된채로 잠에서 깨어난 다음 거실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엄마를 발견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다크한 느낌의 소설이었다. (출처 : Pixabay)

목에 깊은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며 쓰려져 있는 엄마. 자신의 손에 들려져 있는 아버지의 유품인 '면도날', 엄마 주변에 찍혀있던 피 묻은 발자국이 이어진 자신의 방은 자신이 엄마를 쓰러트린 장본인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한유진의 심리 묘사와 머리속에서 돌아가는 논리회로들이 참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가상의 침입자가 엄마를 해쳤다는 가설을 세우고 증거들을 짜맞춰봤지만 그 가상의 침입자가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결론으로 이르렀다.

결국 함께 동거하고  있던 유진의 의붓형인 '김해진'이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식어버린 엄마를 치우고, '개병'이 났던 몇 시간 전의 흔적들을 필사적으로 지웠다. 그 과정에서 해진에게서 '개병'의 끔찍한 결과물을 숨기려는 유진의 상황과 심리가 스릴러만큼이나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영화 메멘토

이후 영화 "메멘토" 식의 사건 전개로 점점 기억에서 지워진 과거의 사건들이 재생되며, 진주 귀걸이와 관련된 방조제 살인 사건도 떠올리게 되었다. "메멘토"식 사건 전개는 잘못하면 독자를 굉장히 피곤하고 지루하게 만들 수 있었지만  『종의 기원』은 사건과 사건의 전개 자체는 굉장히 단순하기 때문에 중간에 잠드는 일은 없었다. (영화 메멘토는 보다가 컨텍스트를 잃어서 자버렸다. 집중력이..ㅜㅜ)

'개병'이 나서 진주 귀걸이를 한

진주 귀걸이 사건에서 그치지 않고, 엄마가 남겼던 의문의 "그 때"를 추적하기 위해 엄마의 책상에서 발견한 '일기인지 메모인지'하는 것을 읽으면서 소설의 후반이 진행된다.

주인공 한유진은 엄마와 의붓 형제인 '김해진'과 함께 살고 있었다. 함께 살게된 이유는 해진의 할아버지와 관련된 사고, 그리고 해진이 유진의 친형인 유민과 매우 닮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유진의 친형인 유민은 유진이 나중에 세세하게 기억하게 되는 16년전 탄도섬 펜션에서 벌어진 사고로 죽었다. 유진의 아버지 역시 그 때 사고에서 유민을 구하기위해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죽었다. 소설의 제일 마지막에 묘사되는 사건으로 유민과 유진이 서바이벌 게임을 하면서 벌어졌다. 총알을 다쓰고 새총으로 돌을 발사해 유진의 머리를 터트린 유민이 승리를 알리는 종을 울리자 유진의 머리속에서 킬 스위치가 켜졌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종탑에서 종을 치고 있는 유민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휘청이는 유민을 발로 걷어차 버리는 유진. 

"웃기지 마. 살아남는 쪽이 이기는거야"

그리고 절벽으로 떨어지는 유민. 그 장면을 목격한 엄마. 모든 것이 이 사건에서부터 시작했다.

엄마는 자신의 동생인 '김혜원'에게 유진의 진료를 치료를 의뢰했다. 그 다음부터 엄마와 이모의 간섭이 시작되었음을 소설의 마지막에 알게 되었다. (진짜 마지막에는 해진과 차를 타고 자수하러가다가 사고가 발생하는 거였지만...) 

그것도 그렇지만 주인공을 제외한 주요 인물을 다 죽일 줄이야...

(출처 : Pixabay)

이 소설은 사이코패스 '한유진'의 1인칭 시점에서 진행된다는 점이 참 인상 깊었다. 일반인과 다른 사고 방식, 논리 전개를 가진 사이코패스의 생각을 어렴풋이나마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고해야하나? 작가 역시 사이코패스의 심리를 묘사하기 위해 많은 취재를 했으리라 생각된다.

살인을 저지른 '유진'의 심리에는 죄책감이나 좌절감 등이 주로 묘사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은폐했던 살인의 현장을 들켰을 때의 좌절감이 더 크게 묘사되어있었다. 사이코패스라면 저렇게 행동하겠구나...

소설의 시작부분부터 마지막부분까지 긴장감을 가지고 읽은 몇 안되는 책이다. 한유진에게 죄책감이나 양심이 없었던 것처럼 이 책에는 지루함이 없었던 것 같다. 잘 읽었다.

(이북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책에 그림이 거의없다. 빽빽한 묘사로 상황을 설명하는데, 생생한 묘사로 그림이 없어도 그림을 본 것같은 착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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